하나님께서는 항상 중보자를 통하여 역사하신다.
중보자에게 속한 자들, 곧 언약 백성의 하나님으로 일하시는 것이다. 아담 시대는 아담을 통하여, 노아시대는 노아를 당대의 중보자로 세우셔서 구원의 일을 행하신다. 족장시대는 아브라함과 족장들을 통하여, 모세시대는 중보자 모세에게 속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신다. 이처럼 사람 중보자를 통한 구원사역은 죄 아래에서 시행된 경륜이다.
하나님의 옛 경륜은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족장들을 거치면서 점차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스라엘이 민족을 이루자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하신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하신다.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선포하셔서 나라로 설립하신 것이다.
이처럼 옛 경륜은 역사에서 발전하여 모세를 통해서 성문화된다.
이는 이스라엘이 나라로 설립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심은 나라 백성인 이스라엘과 동거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알고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모세율법은 개혁신학의 주장처럼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이 지킬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를 대망하도록 주어진 구원의 기준이 아니다. 모세율법은 옛 언약과 통치의 법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 알고 섬기도록 주어진 생명의 법이다.
이처럼 모세율법은 옛 경륜이 역사에서 성장하여 결실한 열매이다. 모세율법은 이스라엘과 옛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질서이다.
회개는 언약적이다. 이는 언약갱신에 따라 회개의 내용과 모습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구약시대의 회개는 무엇인가? 여호와에게로 돌이키는 것이다. 어떻게 돌이키는가? 각 시대 중보자의 하나님 여호와에게로 돌이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중보자를 통하여 그의 백성과 온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담시대에서는 아담에게 나아와 그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노아시대에서는 노아에게 나아와 그의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것이다.
족장시대는 족장들에게 나아와 그들과 연합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며 모세시대는 모세율법을 떠난 죄를 회개하고 모세율법에 부착하여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다.(느 8:1-12)
느헤미야를 생각해 보라.
학사 에스라와 그를 돕는 자들이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들로 다 깨닫게 하자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울고 회개하였다.(느 8:4-9)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의 회개는 무엇인가?
율법 아래에서의 삶을 버리고 예수께 나아와서 함께 거하는 것이다.(마 4:18-22)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그들 가운데 오셨기 때문이다. 이제는 휘장의 가리움이 없이 하나님께서 직접 접견하시고 동거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께 나아옴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한 새로운 통치에 거하는 일이다.(요1:43-51, 빌3:4-11)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 뜻을 따라 제자들을 부르신다. 이러한 예수의 초청에 제자들은 즉시에 응답하여 예수를 따랐으며 함께 거하였다.(마18-22, 빌3:5-16)
오순절 이후의 회개는 무엇인가?
예수를 믿고 죄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영접하고 복음의 통치 가운데 거하는 일이다.
이처럼 회개는 각 시대에서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서는 일이다. 이는 언약적인 바른 관계에 선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언약갱신에 따라 달라진다. 모세시대에는 율법에로 돌아서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나아오는 것이다.
오순절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된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종말의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거하는 일이다.
바울의 고백을 생각해 보라.
바울은 구약과 신약시대, 곧 율법의 통치와 복음의 통치를 모두 경험한 유대인이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하여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의 족속이다.
유다지파를 한번도 배반하지 않은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다. 율법에 대해서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은 율법 선생인 바리새인이다.
하나님께서 대한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한 정도이다. 따라서 나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의로운 자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율법 아래에서의 삶, 이전에 내게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
이는 그리스도를 위함이다.
이는 예수를 아는 지식이 율법과는 비교할 수가 없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한다.(빌3:5-8)
왜 바울은 율법 아래에서의 삶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하는가?
이는 율법 아래의 삶은 종과 어린아이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는 율법 아래의 삶은 죄와 사망 아래에 거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다.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속량하셔서 아들로 세우시기 위함이다.
이는 휘장 밖, 곧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휘장안 하나님 자신 안에 세우시기 위함이다.
율법시대의 회개는 무엇인가?
율법을 범하고 죄에서 율법에로 돌이키는 것이다.
이방신과 이방나라의 권세를 사모한 죄에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에게로 돌이키는 것이다.
이는 언약 당사자로서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 하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베풀 때 그에게 나아온 백성들은 무엇을 회개하였는가? 이방나라의 지배, 곧 로마의 권세 아래에 있음을 회개하였다.
왜 그들이 로마의 권세 아래에 있게 되었는가?
이는 그들과 조상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율법을 범한 죄를 회개하였다. 이러한 회개는 그들 뒤에 오시는 천국의 왕,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이다.
이는 모세가 시내산에 강림하시는 여호와를 맞도록 백성들의 옷을 빨게 하고 여인을 금하게 한 것과 같다.(출19:14-15)
따라서 예수님 당시의 회개는 율법 아래의 삶을 버리고 그들 가운데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와 그와 함께 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순절 이후의 회개는 무엇인가?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와 그를 믿는 것이다. 회개나 거듭남, 믿음은 한 자리에 있다. 이는 회개가 그들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로 돌이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개는 거듭남을 수반한다. 이는 거듭남이 아들의 나라, 곧 종말의 천국에로 들어감이기 때문이다. 이는 종말의 천국 백성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제 율법 외에 하나님 한 의가 나타났다고 말한다.(롬3:21-22)
이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심에서 율법과는 다른 새로운 관계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율법 아래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이다. 그러나 율법 외에 나타난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이는 하나님으로 섬기는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로 섬기는 관계라는 말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게 된 후에는 이전의 율법 아래에서의 삶, 종으로서 살았던 삶을 슬퍼하고 회개한다.
왜냐하면 종으로 산 것은 휘장의 가리움, 곧 죄로 인한 삶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약시대의 회개이다.
이것이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한 고백이다.(빌3:5-10)
따라서 회개나 중생을 언급할 때에는 개인의 도덕성에서 출발하면 안되며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에서 생각해야 한다.
개혁신학은 구원이란 먼저 도덕적인 책망, 곧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의 구원과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구원의 원리는 신구약백성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율법은 죄를 깨닫고 복음으로 구원을 받는 개인의 구원과정이 아니다.
율법은 인간이 부패하여 지킬 수가 없는 하나님의 기준도 아니다.
율법은 옛 언약과 하나님의 옛 통치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고 섬기도록, 그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은혜를 누리도록 주어진 생명의 법이다.
구약시대에 율법을 통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알고 심기는 다른 길이 있던가?
모세를 통하지 않고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증거 하신 적이 있으시던가?
따라서 율법은 개혁신학의 주장처럼 인간이 지킬 수가 없는 하나님의 지고한 구원의 기준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서 그들의 죄를 깨달았다. 학사 에스라와 그를 돕는 자들이 율법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할 때에 백성들은 모두 다 울면서 회개하였다.(느8:1-12)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생명의 법이다. 그들이 제사장 나라로 살아가도록 주어진 삶의 지침서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하여 언약 당사자로서 범한 죄, 곧 율법을 범한 죄를 깨닫고 율법에로 돌아서서 율법이 약속한 생명과 복을 누렸다.
그러나 신약백성들은 복음에서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주어지는 언약의 생명과 복을 누린다.
회개와 믿음은 신앙이 성숙해 나가는 단계적인 과정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과 한 몸으로 사는 문제이다. 하나님의 은혜, 언약적인 은혜를 누리는 것은 언약백성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이는 언약적인 관계를 따라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동행의 문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문제이기도 하다. 율법 아래에서의 관계, 곧 휘장의 가리움이 주어진 관계는 종의 관계이다. 이러한 율법 아래에서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심에서 온전한 관계에로 완성된다.
종 된 관계가 아들의 관계에로 온전케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형상을 이루는 일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역사를 동행하면 우리의 생명이 지향하는 목표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와서 첫 창조질서에 가리워진 그리스도의 권세와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와 거룩과 영광의 실체를 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사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고 능력이며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