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장별이해 (16)
★ 마가복음 장별이해 ★
1. 마가복음 장별 요약
제 1장- 종의 출현
제 2장-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제 3장-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제 4장- 종의 비유
제 5장- 종의 권능
제 6장- 핍박의 고조 및 종의 사역의 확장
제 7장- 종의 이방 사역
제 8장- 종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제 9장- 종의 수난과 영광에 대한 거듭되는 경고
제10장-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종
제11장- 종의 예루살렘 입성
제12장- 가열되는 음모와 종의 대응
제13장- 종의 감람산 강화
제14장- 체포당하시는 종
제15장- 십자가상의 종
제16장- 종의 부활
☛‘마가복음’
마가는 예수님의 사역을 단순한 문체와 분명한 어조로 소개합니다.
‘곧’, ‘즉시’ 같은 부사를 많이 사용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이 얼마나 긴급한 지를 강조합니다. 시작부터 복잡한 설명(예를 들어 출생 관련기사, 어린시절 등)을 다 생략하고 곧바로 침례요한,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장면,
광야에서 시험을 받는 장면을 언급하는데 이것 역시 설명이나 해석이 거의 없이 사실 그대로만을 전하는 어조입니다.
그만큼 복음의 긴박성을 절실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베드로의 수행원이자 서기인 요한 마가입니다.
유세비우스를 비롯한 교부들의 자료도 이것을 지지합니다.
-기록 연대는 대략 주후 50년대 중후반부터 65-70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네개의 복음서 중에 제일 먼저 쓰였다는 점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의견을 같이 합니다.
-내용상으로는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사역과 가르침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수난과 부활의 2중 구조를 띱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성을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1:15) 소개합니다.
때가 급하고 나라가 가까우니 주저하지 말고 돌이켜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몇몇 제자들을 부르고 곧 이어 다양한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칩니다. 일부러 죄인들과 어울리며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2:17) 당신이 온 목적을 강조합니다.
안식일의 의미를 왜곡하는 사람들에겐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28) 선언합니다.
특히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서기관들에겐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3:29) 경고합니다.
<1장>종의 출현
(1:1-13) 마가는 자신이 듣고 경험한 복음을 아직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꼭 전해야 한다는, 그것도 아주 급하게 전해야 한다는 긴박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이 다른 복음서와 같은 도입부를 포기하고 곧바로 복음을 제시하는 까닭입니다. 세례 요한에 대한 소개, 예수님의 침례장면, 시험을 이기는 내용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바로 복음을 전하는 모습으로 들어갑니다.
(1:14-45) 이어 마가는 예수님이 전한 복음의 능력이 표출되는 것을 더러운 귀신이 들린 사람, 시몬의 장모, 각종 병이 든 사람들 그리고 나병환자에 이르기까지 한사람 한 사람을 온전히 고치는 기적을 통해 증명합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은 아직 자신을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시킵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민족주의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관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불필요한 오해를 사전에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장>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2:1-12)예수님은 가버나움의 한 집에서 중풍에 걸린 환자를 고칩니다.
당시 유대 가옥의 지붕은 평평했는데 보통은 외부에서의 접근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나뭇가지와 막대기에 진흙을 더하고 간혹 점토 기와를 사용해 만들어서 구멍을 내기도 수월했습니다.
5절에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치는데 여기서 그들은 데려온 친구들의 믿음을 가리키지만 중풍병자의 믿음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병을 고치는 것은 물론 근본적인 문제인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다는 걸 드러냅니다.
구약시대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습니다.’라고 선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2:5)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직접 죄를 용서할 수 있음을 보입니다.
(2:13-17) 레위(마태)는 세리였지만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제국에 협력하고 부패한 조세제도를 이용해 자기 배를 불린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나를 따르라’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부름에 주저한 기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격이 없다고 자책하지도,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순종하고 따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면서 ‘죄인을 부르러 왔다’(2:17)는 목적을 정확히 밝힙니다.
(2:18-28) 금식, 안식일 준수 등 종교적 형식과 가시적 현상에 몰두하던 사람들에게 새마음을 가져야 새 생각 즉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가르치고 안식의 참된 의미를 알려줍니다.
<3장>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3:1-6) 바리새인들은 병을 고치는 것도 일하는 것으로 간주해 안식일에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28) 밝힌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3:4)이 옳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한 쪽 손이 마른 사람을 고칩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 의논합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일은 구약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멋대로 만들어 놓은 전통을 지키지 않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전통이야말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모세율법의 핵심을 놓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생명력 때문에 회복이 일어나는 현장에, 바리새인의 그릇된 신앙관 때문에 죽음이 거세게 저항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3:13-19) 마가는 13~19절까지 12제자를 부릅니다.
특별히 그 내용을 약술하며 이유를 밝히는데 그것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시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권능을 가지는 것이나 전도하는 것보다 ‘함께 있게 하려’고 불렀다는 것이 먼저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주거나 일을 시키기 위해서 사람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냥 함께 있고 싶어서 부릅니다. 함께 있으면 사랑이 넘치고 감사가 넘쳐 자연스럽게 사역도 하고 능력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3:20-35) 예수님의 가족들과 친족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전문가이자 종교전문가인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바알세불)에게 사로잡혀
기적들이 나타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믿음 사건은 믿음으로만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성과 불신으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대신 일반인, 자연인 예수만 보일 뿐입니다.
☛묵상구절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묵상과 기도.
* 주변에 복음을 들어야 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복음은 누구나 들어야 합니다. 복음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마치 브레이크가 파열된 채 급경사를 치닫는 자동차 같기 때문입니다.
가만두면 죽을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엔 이런 다급함과 긴장감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복음 자체인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지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태도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런 긴급함이 없다면 우릴 통해 복음을 전해 듣고 살아야 할 한 사람을 영원히 놓치게 될 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말하면 되지, 괜히 사이가 어색해지니 다음에 하자라고 미루며 복음을 전하지 않았음을 회개합니다. 명절에 더욱 담대함을 주시고, 지혜롭게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마가처럼 때로는 긴급함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가복음’
생명현상의 특징은 자라는 것과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씨앗이라 해도 그 안에 생명이 있으면 거대한 나무가 됩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고 또 그것을 나눕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것, 열두해를 혈루병으로 앓던 여인을 고친 것 심지어는 죽은 소녀를 살린 것도 생명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생명 말입니다.
<4장>종의 비유
(4:1-20) 예수님이 여러가지 비유로 가르칩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며 신앙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보단 마음의 상태가 더 중요하단 걸 알려줍니다.
(4:21-25) 등불은 등경위에 두는 게 자연스런 이치란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의 빛이 결코 감춰지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빛을 받고서도 그 빛을 말(그릇)로 덮거나 평상(침대)아래에 두는 사람 즉 복음을 나누지 않는 사람은 그 받은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 경고합니다.
(4:26-32) 하나님의 나라는 스스로 자라는 씨앗과 같습니다.
씨가 땅에 뿌려지면 자연스럽게 발아하고 자라서 꽃피고 열매 맺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으면 일어나는 자연현상이 ‘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엔 농부의 노력이 가미되어 있지 않습니다. 복음이 능력 있는 것은 그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면 반드시 생명의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그 생명은 처음에 마치 겨자씨처럼 너무 작아 보입니다. 그래서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아무리 작아도 생명입니다.
결국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커집니다.
역시 생명 때문입니다.
복음의 생명력은 그 누구든 깃들 수 있을 만큼 크고 영향력이 있습니다.
(4:35-41) 그날 밤 저물녁에 바다 건너편으로 배를 타고 갈때 예수님은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피곤해했다는 걸 알수 있는데 그분의 인성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죠. 갑자기 광풍이 불자 제자들은 잠자던 예수님을 깨웁니다.
바람을 꾸짖어 잔잔하게 해 자연에 대한 자신의 신적인 권능을 보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고 하면서 어려운 일이 조금만 일어나도 안절부절하는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5장>종의 권능
(5:1-20) 이 이야기는 이방지역 데가볼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귀신들려 인격도 삶도 망가진 거라사인의 지방에 사는 한 사람과 예수님이 만납니다.
그는 무덤 사이에 살고 있었고 폭주하면 그 무엇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가엾은 사람이었습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7’) 간청합니다.
예수님이 이미 ‘더러운 귀신아 그사람에게서 나오라’ 명했기 때문입니다.
쫓겨난 귀신은 돼지 떼에게 들어가 바다에서 몰사합니다.
이 놀라운 사건을 본 그 지방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떠나기를 간구합니다.
예수님은 귀신 들렸던 사람을 다시 만난 후 가버나움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굳이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간 건 이 사람때문이었습니다.
한 영혼을 위한 배려입니다.
마가는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복음의 생명력은 그 대상이 누구든 어떤 처지든, 어떤 조건이든 상관없이 전해져서 그 사람을 살리고 회복하는데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5:21-43) 가버나움으로 돌아온 예수님에게 회당장 야이로가 찾아와 죽어가는 딸을 살려 달라 간청합니다
가는 길에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그녀의 믿음은 즉각 몸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혈루증은 일종의 유출병으로 율법에 의하면 격리돼야 합니다. 당연히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과 접촉하는 모든 것이 더러워진다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불문율과 율법을 어길 정도로 절박한 여인의 믿음 율법의 목적이 결국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걸 알고 있었던 예수님 이 둘의 만남이 회복으로 나타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4’)
어떤 법보다도 더 큰 예수님은 부정해지는 대신 오히려 자신의 능력으로 그녀를 깨끗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어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으로 죽었던 딸이 살아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41’) 죽음조차 생명의 능력 앞에 굴복하며 소녀를 삼켰던 사망의 굴레에서 토해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예견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저기에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기적을 행했지만 고향 사람들은 자연인 예수의 이미지에 갇혀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목수의 아들은 결코 메시아일 수 없다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장로들을 비롯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스로 세운 전통과 스스로 해석한 율법 자기들의 전통적 메시야관을 지키기 위해 집착하느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도 못할뿐더러 메시아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거역까지 합니다. 제자라고 달랐을까요?
베드로는 그토록 멋지고 귀한 신앙고백을 한 직후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항변하다 책망을 듣습니다.
이 모든 게 결국 자기 뜻을 꺾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그위에 부텅 자기 생각을 정당화하려는 죄의 전형입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은 ‘스스로를 부인하라’라고 가르칩니다.
<6장>핍박의 고조 및 종의 사역의 확장
(6:1-6) 예수님이 고향에서도 가르칩니다.
자기들에게 익숙한 자연인, 예수로 기억하는 고향 사람들은 가르침을 듣고 놀라지만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배척합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의심과 경멸이 섞인 질문이 이어집니다.
이들의 반응을 이상히 여긴 예수님은 더이상 기적을 행하지 않습니다.
고향사람들의 반응은 어쩌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자연스럽다고 다 양해되는 건 아닙니다.
믿음은 이성과 경험을 뛰어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6:7-13) 예수님을 따르라고 부름받은 열두 제자는 예수님을 전하라고 보냄받은 사도가 됩니다.
이 사명을 위해 예수님은 얽매일 가능성이 있는 것들 생활의 안정을 상징하는 양식, 배낭, 전대의 돈, 두 벌 옷 등을 내려놓아야 한다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전도할때 예수님이 행했던 것과 같은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6:14-29) 이 소식을 접한 헤롯은 전에 자기가 죽였던 침례요한이 살아났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은 과거에 침례요한이 헤롯의 잘못을 지적했다가 목이 잘려죽은 이야기를 서술합니다.
(6:30-44) 오병이어의 이야기는 사복음서에 모두 등장합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의미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른 큰 무리가 목자 없는 양같은 생각이 들어 여러가지로 가르치며 ‘영의 양식’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그들의 배를 채우는 ‘육의 양식’도 줍니다.
하나님이 사막에서 만나를 공급하듯이 예수님도 빈들에서 양식을 공급하는 것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임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6:45-52) 무리와 작별한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갔다가 물위를 걸어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로 갑니다.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은 유령인줄 알고 놀라지만 예수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말라’하고 배에 오릅니다. 자연마저 다스리는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납니다.
<7장> 종의 이방 사역
(7:1-23)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몇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보내 진상을 파악하려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 예수님의 행동이 거슬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손씻기 기구, 비품을 규정한 후대의 유대전통을 어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외식을 이사야 말씀 (사 29:13)을 인용해 지적합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자기들이 만든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 올려놓고 자기들도 지키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지키라 강요하는 위선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 게 한다’ 중심의 동기와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줍니다.
(7:24-30) 예수님의 거의 모든 사역은 전통적인 이스라엘 경계선 안의 유대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데가볼리 지방으로 가서 사람들을 고치기도 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두로 지방을 방문하는데 여기에서 우여곡절 끝에 이방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줍니다. 마태복음에서 언급했듯이 이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도 열려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7:31-37) 다시 갈릴리로 돌아온 후에는 귀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고칩니다.
특이한 것은 여느 때와 달리 손가락을 양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대며 하늘을 향하여 탄식하며 ‘에바다’ 곧 열리라 선포하며 고친 점입니다.
☛묵상구절
4:30-32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묵상과 기도.
*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고 있습니까?
생명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성장하는 걸 멈추지도 않습니다.
생명이 자라게 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자연스럽게 생명을 전이시킵니다.
내가 경험한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게 합니다.
생명이 퍼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어둠을 좇지 않습니다.
도리어 어둠을 상징하는 죽음조차 이겨냅니다.
생명자체가 빛이기 때문입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경험한 생명, 예수그리스도를 나눌 때 겨자씨 작으나 나무가 되고 퍼지고 커져서 그생명을 전부가 누리게 됨을 깨닫습니다. 오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8장>종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8:1-10) 그 무렵 또 큰 무리가 먹을 것이 없어 주리자
떡 일곱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4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합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기적을 행한 동기입니다.
개인이 찾아오건 무리가 찾아오건 예수님 안에 있는 긍휼한 마음이 사람을 먹이고 살립니다.
(8:11-13) 이런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트집 잡아 따지고 드는데 하늘로부터 오는 다른 표적을 구합니다.
예수님은 깊이 탄식하며 표적을 주지 않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상반된 내용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원래 의도는 악한 세대
즉, 전통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관에 사로잡힌 자들이 구하는 메시아적 표적은 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마태와 누가는 이를 조금 더 풀어서
바리새인들의 메시아관에 따른 표적 대신 예수님의 메시아관
즉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졌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사는 표적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 강조한 것입니다.
(8:14-26)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 곧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위선 외식을 주의하라고 경고한 다음 벳세다에서 맹인을 고칩니다.
(8:27-38)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에 갔을 때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데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대답합니다.
그 때 ‘비로소’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려져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가르칩니다. (1st 수난예고)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오해를 바로잡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베드로가 항변하지만
도리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책망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이어 제자의 길에 대해 가르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9장>
(9:1-8) 마태복음 17장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변형되는 데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만유의 심판자이신 예수님의 신적 형상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첫번째 수난예고(8:31)를 한지 엿새째, 두번째 수난예고(9:31)를 하기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죽음을 예고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고 반드시 살아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을 일부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9:9-29) 저자 마가는 산 위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바뀐 예수님이
장차 모든 것을 회복할 것이란 가시적 예언을 보도하는 반면
산 아래에서는 여전히 질병이란 문제에 부딪혀
아등바등하는 현실을 고스란히 대비시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여’나무라며 질병에 걸린 아이를 고쳐줍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묻는 제자들에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답하며
치유도 구원도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9:33-37) 제자들은 여전히 누가 큰 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산위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세명의 제자들도 이 경쟁에 열을 올린 것 같습니다. (9:34)
예수님의 가르침은 타협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9:38-50) 한편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실족하지 않게 하는 것(42’)이 성숙한 믿음인데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엔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을 것이라 경고합니다.
새번역엔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인 듯 불에 졀여질 것이다’(49’)라고 나옵니다.
마가복음에만 등장하는 이표현에 대한 해석은
48,49절을 이어진 내용으로 볼것인지
49,50절을 다른 새로운 문단으로 볼것인지 따라 완전히 달라집니다.
일반적으로는 이땅에서 살 때 이미 소금 뿌림을 받은 제물처럼
정결하게 살았어야 할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에서 불을 소금처럼 그들에게 뿌려 그들을 소독하고 형벌한다는 표현입니다.
그만큼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자가 받을 벌이 크다는 뜻입니다.
<10장>
(10:1-12)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을 시작합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모세 즉 율법에 이혼 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버리도록 한 내용으로 질문과 답이 오갑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이혼을 허락한 것은 사람들이 가진 완악함 때문이라 설명한 후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선을 긋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을 훼손하는 인간의 죄성을 알려줍니다.
(10:13-31) 이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 같아야 들어갈 수 있다 말하고
가진 게 많다고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밝힙니다.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만큼 순전해야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현세에서는 ‘박해’란 상급이
내세에서는 ‘영생’이란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10:32-34) 이전까지 제자들이 길을 앞장섰으나. 이제 예루살렘이 가까이 오니 예수님이 앞장섭니다. 이에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가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이 세번째로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예고 합니다.
(10:35-45) 제자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누가 큰 지 자리다툼을 합니다.
특히 마태복음과 달리 마가복음에서는 자리청탁을 한 것이
야고보와 요한이라 명시하며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오해했는지
그의 사역과 성육신의 목적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여과없이 보여줍니다.
3년을 함께 다녔는데도 제자들의 생각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건
사람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온 목적을 다시 알려주며 제자들의 그릇된 이해를 바로잡아 줍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45’)
<11장>
(11:1-11)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과정은 공관복음서 모두 비슷합니다.
입성할 때 탔던 새끼 나귀, 그것을 끌고 오는 과정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란 내용 등이 거의 비슷합니다.
다만 마태복음에서는 스가랴서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 부연합니다.
(11:12-14)예수님이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먹지 못하리라’이르는데 하루가 채 못돼 말라버립니다.
(11:20-24) 이를 두고 궁금해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믿음에 대해 가르칩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는 공허한 의식과 율법주의로 겉만 번지르르 한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열정이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것이라 착각한 이스라엘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서로를 용서하며 살았어야 했던 이스라엘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해서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11:25)예수님은 이어서 믿음으로 시작될 새로운 관계
즉 아무에게나 무슨 혐의가 있어도 서로 용서하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12장>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과 권위를 두고 질문이 오간 후(11:27-33)
(12:1-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포도원 농부 비유를 들어 그들의 위선과 종교적 기득권을 꼬집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 포도원은 이스라엘, 농부들은 종교지도자들 소출을 받아내기 위해 심부름하는 종들은 선지자들 아들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의 교만과 죄악을 적나라하게 들춰낼 뿐 아니라 그들의 종교적 폭력성이 머잖아 자기자신 곧 메시아까지 죽일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잡고 싶었지만 무리들을 두려워한(12’) 나머지
(12:13-17) 납세문제를 들어 꼬투리를 잡으려 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대답하며 도리어 자기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마태복음 22장)
(12:18-27)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계대 결혼법을 오해해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부활 때에는 현세와 상황이나 제도가 다르다는 걸 몰랐기 때문에 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오해했다고 지적합니다.
(12:28-31’) 이어 예수님은 서기관 중 한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구약의 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합니다.
(12:41-44)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가 가진 전부를 드린
가난한 과부의 행동을 칭찬하며 하나님의 관심은 마음을 다해 드리는 것에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많이 드려도 마음이 실리지 않으면 드리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고 적게 드려도 마음을 실어 드리면 모든 걸 다 드린 것과 같다는 것이 하나님의 셈법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여정
8:27 빌립보 가이사랴 (갈릴리 북단)
9:30 갈릴리 가운데로 통과
10:1 유대지경과 요단강 건너편
10: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
10:46 여리고
11:1 벳바게와 베다니
11:15 예루살렘 성전으로!
11:27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묵상구절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묵상과 기도.
*예수님이 이땅에 온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신앙은 좌표를 잃었을 때, 신앙이 내 뜻과 의지를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했을 때, 신앙의 본말이 전도되었을 때,
이걸 바로잡는 방법은 예수님이 이땅에 온 목적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았고 군림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섬기러 왔고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자기정체성과 자기사명선언 앞에 어떻게 ‘내뜻, 내의지, 내욕심’을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을 제대로 잡아주는 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내 뜻, 내 의지, 내 욕심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길 원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고, 삶에서, 입술에서 오직 예수님만 흘러나오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자신이 이땅에 온 목적을 분별하였던 것처럼 저 또한 이 땅에서의 사명을 분별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3장>
(13:1-2) 성전에서 가르치고 나가는 예수님에게 제자 중 하나가 예루살렘 성전이 어떻게 될지 묻습니다.
외형적 규모와 신앙적 자긍심을 자랑하듯 던진 질문이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싸늘합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성전건물이 완전히 무너질 거란 예언은 그들이 잘못된 열심으로 쌓아 올린 종교적 오만이 무너질 것이란 뜻이고 대신 마음과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참 성전, 곧 성도 개개인이 성전이 되어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게 될 것이란 복선입니다.
(13:3-27) 성전이 무너질 것이란 충격적 예언을 들은 제자중 베드로, 요한, 안드레가 ‘그렇다면 어느때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 징조는 무엇인지’ 묻습니다.
예수님은 징조에 대해 주로 대답하는데 마태복음에서도 언급했듯이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의 종말을 동시에 설명합니다.
5-23절은 지역적 사건과 성전파괴, 박해, 복음전파등 전 세계적 사건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24-27절은 우주적 사건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성전파괴가 세상끝에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7절과 13절의 말씀을 통해 그들의 생각을 바로잡습니다.
예수님은 14절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하던 일이나 가진 것에 연연해하지 말고 속히 산으로 도망하라 합니다.
여기서 ‘멸망의 가증한 것’은 단9:27 말씀을 인용한 표현입니다.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다니엘의 이 예언은 흔히 마지막 때에 일어날 가시적 현상을 대표합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섰다면 그때가 마지막 때란 뜻입니다.
그 끝에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올 것입니다.
(13: 28-37) 이어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 수 있듯 당신의 재림의 때가 반드시 다가올 거란 사실을 말합니다.
다만 그 때가 언제일지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여정은 이제 골고다의 십자가로 향합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동도 유월절 만찬에서 내 몸과 피를 먹으라 말한 것도 겟세마네에서 간절히 기도를 드린 것도 붙잡혀 공회 앞과 빌라도 앞에 선 것도 결국 십자가를 향한 여정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명 때문에 왔고, 이 사명을 위해 살았으며 이제 이 사명을 위해 못 박힙니다.
그러나 생명이 죽음에 갇혀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예고한 대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 생명의 복음을 전할 것을 당부하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14장>
(14:1-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지만
민란이 날까 두려워 명절을 피하는 것으로 결정합니다.
(14:3-9)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할 때 한 여자는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인 남자의 300일 분량 임금을 한순간에 깨뜨려 허비한다고 비난했지만 예수님은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라 말하며 이 여인의 행동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회자될 것이라 합니다.
(14:10-11) 유다는 결국 예수님을 팔기로 작정하고 돈을 받습니다.
(14:12-25) 무교절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합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나눠 먹이며 자신이 유월절 양이 되어 죽게 될 것을 비칩니다.
애굽에서의 구원을 상징하는 유월절 그래서 대대로 지켜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도록 절기로 만든 유월절 그렇지만 정작 그 의미는 퇴색된 채 형식만 남았던 유월절 예수님은 친히 유월절에 잡아 먹히는 어린양이 되어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자에게 진정한 구원을 선물하는 거룩한 예식을 새로 만든 것입니다.
(14:26-31) 예수님과 제자들은 마지막 만찬을 마치고 감람산으로 갑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지만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장담합니다.
(14:32-42)이제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시간을 기도로 극복합니다.
사람으로서 느끼는 두려움과 생명이 죽음을 경험해야 하는 상황은 물론
십자가 없이도 영광을 얻을 수 있다는 유혹과 신적인 능력을 무한히 사용하라는 도전(막15:9-32)을 다 기도로 이겨냅니다.
그렇게 할 수 있게 한 결정적 고백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입니다.
(14:43-50) 제자들은 절대 배반하지 않을 거라고 호기롭게 장담했지만
예수님이 검과 몽치를 든 무리에게 잡히자마자 모두 도망가 버립니다.
(14:51-52) 51,52절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따라가다 도망간 청년의 이야기는 오직 마가복음에만 나오는데 이로 인해 주석가들은 이 청년이 바로 이 복음서의 저자인 마가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14:66-72) 자신의 정체를 알아챈 종에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의 이야기는 사복음서에 모두 등장합니다.
이처럼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들의 연약함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지만, 그런 그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복음의 사도로 키우는 예수님의 사랑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소망과 위로가 됩니다.
(14:53-65) 잡힌 예수님은 공회 앞에 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칠 증거를 찾기위해 증인들을 세우지만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공생애 내내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살았던 예수님에게서 흠결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일이 아니면 예수님을 죽일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61’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이란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것(62’내가 그니라)을 빌미로 신성모독죄를 씌워 사형을 언도합니다.
<15장>
(15:1-15) 빌라도에게 넘겨진 예수님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묻는 빌라도에게
‘네 말이 옳도다’ 답하며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이 말을 끝으로 침묵합니다.
빌라도는 이를 놀랍게 여기지만 결국 군중의 소리에 빠져 바라바를 내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줍니다.
(15:16-39) 희롱을 당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이르러 못 박힙니다.
좌우에는 강도 둘이 달립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시험(막15:29-32)을 이겨냅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을 다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제 구시에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소리 지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엘리야를 부른다고 조롱합니다.
예수님은 크게 소리 지르고 숨집니다.
그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됩니다.
곁에 있던 백부장은 예수님이 숨지는 과정을 지켜본 후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고백합니다.(39’)
(15:40-47) 한편 이 광경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섬기던 사람들입니다.
이름이 알려진 제자들보다 무명에 가까운 이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존경받는 공회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있습니다.
그는 당돌하게도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 요구하고 세마포에 싸서 자신의 무덤에 넣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이 광경을 다 지켜봅니다.
마가가 예수님이 죽는 과정과 매장까지 자세히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이 역사적으로 사실이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당시 떠돌던 소문들, 예수님이 죽지않고 기절했다는 기절설과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자체가 가짜라는 가현설을 반박하려는 의도입니다.
<16장>
(16:1-8) 안식일이 지나고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가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향품을 지니고 무덤으로 향합니다.
여인들이 무덤입구의 큰 돌을 어떻게 치워야 할지 근심했던 것으로 보아
어떤 기적적인 일도 기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고 예수님의 시체는 간데없이
흰옷을 입은 한 청년만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알려주고 갈릴리로 가서 예수님을 만나라고 합니다.
(16:9-20) 부활한 예수님은 전에 일곱귀신에 걸렸다가 치유를 받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고 두제자에게 나타납니다.
그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을 때에 그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명령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우편에 앉고 제자들은 나가서 두루 복음을 전파합니다.
☛묵상구절
14: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묵상과 기도.
*시험과 위기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복음서에서는 자주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엿볼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제자들을 부르는 모습
군중들의 환호를 뒤로하고 홀로 기도하는 모습
겟세마네에서 마지막시험을 기도로 이겨내는 모습 등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막중한 사명을 홀로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통해 삼위 하나님의 연합과 협력으로 구원이란 놀라운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만일 기도가 쌓이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사람들이 조롱하며 뱉은 말(15:29-32)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이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험과 위기 앞에서 기도하는 일관성 있는 태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뤄 냈습니다.
우리가 배워야할 닮아야 할 모습입니다.
인생의 시험과 위기, 환난 앞에서 기도하는 일관성 있는 예수님의 태도를 배웁니다. 쌓여진 기도의 삶을 통해 유혹을 뿌리치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하는 용사로 서게 하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