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8장 이해
‘마태복음’ 28장 장별 이해
예수님의 제자였던 마태는 동족 유대인에게 예수님이 메시아 이시고
다윗왕가의 후손으로 온 왕이라 소개합니다. 이를 위해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구약과 율법을 많이 인용합니다. 예를 들면 서두에 족보를 언급하는 것 중간 중간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말하는 것 등입니다.
본문에 두 번 이름이 언급되는 마태는 예수님이 그를 부르실 때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였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선 그를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부릅니다.
마태복음이 언제 쓰여졌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전통적으로 주후 50년대 후반~60년대 초반으로 추정하며 일부 학자들은 70-100년 사이에 쓰였다고 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의 주제는 ‘약속된 메시아요 왕으로 오신 예수를 통한 구원’입니다.
특징은
(1)유대적 성향이 강하고
(2)율법의 유효성 즉 행함을 강조하며
(3)교회에 대한 관심이 다른 복음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는 점을 들수 있습니다.
내용상으로는 5개의 설교모음이 중심이고 지역적으로는 갈릴리에서 시작à 예루살렘에서 마치는 구조입니다.
5개의 설교모음은 산상수훈(5-7장),
제자파송설교(10장),
천국비유말씀(13장),
제자공동체설교(18장),
종말설교(24-25장)
이 설교모음을 중심으로 앞뒤로 예수님의 기적과 행적, 주요 가르침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1. 마태복음 장별 요약
제 1장-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제 2장-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 시절
제 3장-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제 4장-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제 5장-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제 6장-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제 7장- 천국에 들어가는 길
제 8장-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제 9장-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제10장-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제11장-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제12장-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제13장- 천국에 관한 비유들
제14장-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Ⅰ
제15장-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Ⅱ
제16장- 메시야의 자기 공개
제17장-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제18장- 천국 시민의 윤리관
제19장-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제20장- 천국의 實相에 관한 교훈
제21장-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제22장-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제23장- 종교 지도자들에 관한 경고
제24장-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제25장-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제26장- 메시야의 최후 만찬
제27장-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제28장- 부활하신 예수
<1장>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1:1-17)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전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구약율법과 전통에 익숙한 그들에게 마태는 ‘예수는 메시아며 약속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왕이다’선포합니다.
마태가 서두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계보라’족보를 언급한 이유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까지 내려오는 이 족보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14대씩 세 번에 걸쳐 예수님에 이르도록 기록했습니다.
아브라함~ 다윗까지 14대
다윗~ 포로로 잡혀갔을 때까지 14대
바벨론 포로기~ 예수까지 14대/ 그런데 자세히 보면 구약의 족보와 비교할 때 딱 맞아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학자들은 마태가 앞서 언급한 다윗왕정시대, 바벨론 포로기등 이스라엘의 굵직한 사건을 기점으로 일부러 14대에 맞춘 것으로 봅니다.
‘14’라는 숫자가 7 곧 완전수의 배수여서 왕으로 오신 예수님 역시
하나님의 완전한 섭리 속에 왔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추측합니다.
(2) 이 족보에는 5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가나안 출신으로 유다의 며느리였던 다말
-여리고의 창녀였다 살몬의 아내가 된 라함
-모압 출신으로 보아스의 아내가 된 룻
-이방인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였다가 후에 다윗의 아내가 된 밧세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à 이들 모두는 이방 출신이거나 혹은 비정상적 관계와 출산이란 공통점을 지닙니다. 메시아 족보에 올리는 것을 피하고 싶을 만한 여인들이었지만
마태는 의도적으로 ‘사실 그대로’를 기록해서 예수님의 역사성에 무게를 둡니다.
(1:18-25)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나심은 이사야7:14 메시아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다’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는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선 성육신해야 하고,
용서를 위해선 죄가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언의 성취를 믿고 아들을 출산하여 예수라 이름합니다.
<2장>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 시절
(2:1-12) 예수님의 나심을 알고 기뻐하는 사람들은 소수의 이방인이었습니다.
마태는 그들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라 말합니다.이들의 방문으로 예루살렘 일대엔 큰 소동이 벌어집니다. 헤롯 왕도 관심을 보이지만 목적은 달랐습니다.
사도요한이 전하는 것처럼 왕이 자기 땅에 오셨지만 정작 왕을 영접해야 할 백성들은 무지했던 것입니다. 박사들은 예수님의 왕권을 상징하는 예물인 황금,유향,몰약을 드리고 꿈에서 인도받은 대로 헤롯을 피해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2:13-23)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안 헤롯은 예수님을 찾아 죽이려 했지만 요셉은 천사의 지시에 따라 이집트로 피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영아들이 살해당합니다. 헤롯이 죽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데리고 귀국하는데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를 피해 갈릴리 나사렛에 정착합니다.
마태는 일련의 보도에서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이 모든 것이 구약 예언의 성취란 것을 강조합니다.
<3장>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3:1-11)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침례 요한은 그의 가르침과 행적 때문에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의 행색은 기이했고 가르침은 비수 같았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세례 요한은 장차 올 하나님의 통치에 대비해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신실한 삶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예언자였습니다.
이미 많은 백성들이 그를 추종하고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본분을 잘 알았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푸실 것이요.’(3:11)
(3:12-17) 요한은 스스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았고 또 그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침례 요한과 예수님이 만납니다.
대화가 오갑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요한은 정중히 예를 갖춰 메시아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예수님은 성육신할 때와 마찬가지로 겸손하게 한 사람 앞에 서서 물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를 받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물에 잠겨 죽고 물에서 올라오면서 다시 사는 십자가 그림자를 보여주며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하늘에서도 이 놀라운 광경을 기뻐하며 선언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침례를 받은 예수님은 시험을 이겨낸 후 천국을 전파하며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첫아담의 실패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지만 둘째아담 예수님의 승리로 죄를 없애고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될 것이란 암시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의 첫 설교는 천국대헌장 산상수훈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함이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정곡을 찌르는 말들은 하나같이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일깨우며
천국백성다운 삶이 어때야 하는지를 선언합니다.
<4장>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4:1-11) 예수님이 겪은 시험은 인간이 추구하는 3가지 기본적인 욕망입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유혹은 생존의 욕망을,성전에서 뛰어내리면 그가 지킬 것이라는 유혹은 지배의 욕망을, 절하면 모든 걸 주겠다는 유혹은 소유의 욕망을 뜻합니다.
동시에 이 시험은 십자가를 피하라는 유혹, 고난 받는 종이 아니라 왕의 역할을 맡으라는 유혹, 우주적 통치권을 되찾으라는 유혹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셋 모두를 ‘기록되었으되’ 라며 말씀을 인용해 이겨내고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로 인정받습니다.
(4:12-17) 세례요한이 붙잡힐 즈음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왓느니라’ 전파하며 천국복음을 ‘비로소’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4:18-25) 갈릴리 해변에서는 4명의 제자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부르며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약속합니다.
한편 마태는 4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는 것으로 요약합니다.(4:23)
<5장>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5:1-12) 예수님이 가르치고 전파한 내용은 ‘천국대헌장’이라 불리는 산상수훈에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제일 먼저 일반적인 복의 개념을 깨트리고 참 복이 무엇인지 일갈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 이른바 팔복이라 불리는 선언을 통해 천국백성이 누리게 될 복은 세상에서 경험하는 복과 차원이 다르단 걸 선포합니다.
(5:13-16) 천국백성의 정체성은 소금과 빛입니다.
부패를 막고 맛깔나게 하는 소금 고유의 기능, 밝게 비추는 빛 본래의 역할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면서 천국백성다운 착한 행실이 결국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강조합니다.
(5:17-20)예수님은 율법을 폐기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완전하게 하기 위해 왔습니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도리어 6가지 반대명제를 제시하며 강조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살인죄, 간음죄 등은 사형에 해당됩니다.
보통은 사람들이 이런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자연히 ‘적어도 나는 율법을 지켰다’는 생각을 했겠지요.
특히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자부심이 강해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격있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율법준수보단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마음의 동기와 율법의 기본정신이 더 중요하단 사실을 가르칩니다.
‘속으로 형제를 미워한 것은 살인한 것과 진배없다’,(22’)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것은 간음한 것과 다를 바 없다’,(28’)
‘증서를 써서 이혼을 허락한 것을 악용하는 것 자체가 본말이 전도된 관행이다’,(32’)
‘진심이 없는 맹세는 아예 하지 않는 편이 낫고 오히려 그런 것은 그렇다고 아닌 것은 아니다고 말하는 게 낫다’,(33-37’)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은 것은 보복의 악순환을 반복할 뿐이므로 손해보는 결정을 통해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라’,(38-42’)
‘이웃은 물론 원수도 사랑할 대상이니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44’)
이상 6가지 가르침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히 깨우치는 것들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율법의 기준을 마음과 동기로 끌어올려 바리새인을
비롯한 그 누구도 율법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가두어 버립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걸 기정사실화 해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고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강조하는 것입니다.
(# 참고: 바이블가이드)
<6장>천국 시민의 새 생활
(6:1-4) 율법의 정신, 본질에 무게를 둔 예수님의 가르침은 6장에서도 이어집니다.
신앙인은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려는 행동을 멀리해야 합니다.
종교적 의를 쉽게 드러낼 수 있는 행위들 즉 구제, 기도, 금식 등에서 특히 그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구제는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할 정도로 은밀히, 조용히, 그리고 알리지 않고 해야 합니다. 대신 하나님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 됩니다.
(6:5-15) 기도는 골방에서 하나님과 독대하는 만큼입니다.
모든 걸 다 아는 하나님 앞에 정확하고 분명한 언어로 직고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기도의 모범은 주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기도할 내용은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비로소 ‘매일 먹을 양식과 죄 용서를 구하고, 시험에 빠지지 않고 악으로부터 구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하기를 찬양하는 것으로 마무리해야 합니다.
(6:16-34) 금식한다고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금식은 일상과 동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기에 온전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가치관도 바르게 세웁니다.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입니다.
따라서 그 외의 것들, 곧 재물, 먹을 것, 입을 것 등에 매이지 않습니다.
대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합니다.
*천국백성다운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천국백성으로서의 삶,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은 한마디로 가치관이 바뀐 삶입니다.
복에 대한 개념이 바뀐 삶이고, 신앙전반에 걸쳐 태도가 바뀐 모습입니다.
사람에게 보이거나 인정받으려는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까 생각하며 은혜 가운데 온전하도록 스스로를 살피는 삶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게 일상이 돼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그런 천국백성의 삶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는’ 삶은 고스란히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 무엇이 바른 가치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온전한 삶인지 속속들이 드러나게 합니다.
남을 비판하는 게 익숙한 세태에 먼저 자신을 살피라는 말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는 가르침, 열매를 통해 신앙의 진위를 분간하라는 것 등의 말씀은 여느 랍비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가르침은 이내 치유로 현실화됩니다. 예수님은 당시 천형(天刑)으로 여기던 나병환자를 시작으로 질병 때문에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을 고칩니다.
<7장>천국에 들어가는 길
(7:1- 6)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죄의 속성입니다.
남의 눈의 티끌을 봤다면 자기 눈엔 들보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정죄와 비판을 멈출 수 있습니다.
(7:7-12) 하나님이 아버지란 사실을 알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게 자연스럽습니다.
하늘 아버지가 좋은 것으로 주실 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다면 먼저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
이른바 황금률이라 불리는 이 가르침은 은혜법칙대로 사는게 그리스도인 다운 삶이란 걸 알려줍니다.
예수님이 은혜로 우릴 먼저 대접해줬기 때문에 용납되었듯 우리 역시 남을 먼저 대접하는 것, 인정하는 것, 사랑하는 것, 용서하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7:13-29) 예수님의 가르침은 서기관들의 그것과 사뭇 달랐습니다.
넓은 문 대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고 다수가 가는 길 대신 소수가 걷는 길을 선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들은대로 산다면 반석위에 집을 세운 것과 같아서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게 된다고 선포합니다.
<8장>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놀라움 자체였습니다.
마태는 천국백성다운 삶을 설파한 예수님이 이제 사람들의 삶에 실질적으로 들어가 천국백성답게 회복시키는 모습을 그립니다.
(8:1-4)당시 사람들은 나병을 신이 저주한 병이라 여겼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첫 사례로 나병을 든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천형이라 여기는 병을 먼저 고쳐서 왜곡되고 깨지고 문드러진 창조질서를 바로잡는게 바로 메시아인 예수님의 사역이란 걸 밝힌 것입니다.
(8:5-13) 이어 이방인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고칩니다.
예수님이 회복시킬 대상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8:28-34)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는 것 역시 어떤 질병은 정신적인 문제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밝혀 전인적인 회복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이란 걸 알려줍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 받는 종의 이야기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성취라고 보도합니다.(8:17)
<9장>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9:1-8)중풍에 걸린 환자를 친구들의 믿음을 보고 고칩니다.
특이한 점은 일부러 ‘죄사함’(2’)을 언급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이 못마땅했던 서기관들은 신성모독이란 생각을 지울수 없었습니다. 죄를 사할 권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메시아로 현현해 당신의 권능을 나타내고 있지만 유전과 전통에 매여 있던 그들이 알아볼 리 만무하죠. 서기관들의 생각을 간파한 예수님은 스스로를 드러냅니다.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하려 하노라’(9:6)
(9:9-13)마태는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세리인데 예수님이 그를 제자로 부릅니다.
마태의 집에서 식사할때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함께 합니다. 정결법을 철저히 지키던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시비를 겁니다.
‘왜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이 성육신한 이유입니다.
마태는 자신이 부름 받는 과정을 담담히 기술하며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강조합니다. 오랜 세월 고통을 겪던 여인도, 죽었던 소녀도 (9:18-26) 평생 빛을 보지 못했던 맹인도(9:26-31) 귀신들려 말을 못하던 사람도 믿음으로(9:32-33)
예수님 앞에 나아갈때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기적을 보고도 여전히 자신들의 생각과 전통이란 낡은 옷을 입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귀신의 왕으로 비하합니다.(9:34)
(9:35-38) 예수님이 사람들을 대하는 마음은 긍휼입니다.
무리가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고 기진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시길 바랐습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의 수직적 관계가 굳건해야 하지만 눈을 돌려 주변의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우리가 될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에 집중했던 것 가운데 하나가 제자를 부르고 같이 지내며 사명을 심어준 일입니다. 예수님은 삶으로 본을 보였고 제자의 길을 가르쳤으며 결국엔 사명을 부여해 당신의 일을 맡깁니다.
투옥된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묻자 예수님은 이사야 말씀이 이뤄진 것을 근거로 자신이 메시아란 사실을 알립니다.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한 세태를 안타까워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불쌍히 여겨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초청합니다.
<10장>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10:1-23) 예수님이 제자로 부른 12명은 썩 내세울 만한 면면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평범한 사람이었고 심지어는 세리처럼 당시 유대인들에게 사람취급도 못받는 일에 종사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불러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십니다.(10:1)
예수님이 사람을 부르고 세우는 기준은 확연히 다릅니다.
보통은 출신성분, 능력, 배경 등을 따지지만 예수님은 순종 여부를 봤습니다.
12명을 보내며 주신 말씀을 자세히 읽으면 더 분명해집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는 것과 전도여행방식이 그들의 경험과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박해를 받을 것을 예고하고 그럼에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태도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를 뽑는 기준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순종하는 제자들에게 하늘의 하나님이 능히 돌보실 것이란 말씀도 빼놓지 않습니다.
(10:34-42) 또한 예수님은 세상에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왔다고 선언합니다.
복음은 그릇된 가치나 신앙을 잘라내는 검과 같습니다.
내용보다 형식에, 본질보다 비본질에 빠져 몸집만 키운 종교를 일깨우려 던져진 날 선 검 말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런 사람들은 자연히 연약한 자들을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가치의 변화, 삶의 변화가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11장>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11:2-12) 옥에 있던 침례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질문합니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소개했었습니다.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 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요1:32-34)
이랬던 그가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질문한 건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메시아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다시 과거 다윗시대같은 패권국가가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로마의 지배에서 독립하기 위해 메시아는 그 핵심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생각도 큰 차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기대와 달리 다른 구원을 말하고 행동하는 예수님이 의심스러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35장 말씀이 성취된 사실로 대답합니다.(5’)
더불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잘 이해해야 실족하지 않을 것이란 말씀을 덧붙입니다.
(11:11-14) 예수님은 침례요한을 언급하면서 알듯 모를 듯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런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자는 빼앗느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이 가장 큰 자라 말하며 그 사역의 위대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조차 침례요한보다 크다하며 구약에 속한 선지자로서의 그의 한계를 밝힙니다. 세례요한을 기점으로 천국은 강력하게 확장되고 있으며 열망이 있는자가 그것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11:25-30) 복음은 신비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비밀이지만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자들에게는 밝히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복음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삶의 무게와 종교적 의무감에 지금까지 계속 지치고 낙담중에 있는 우리들을 향한 초대입니다.
<12장>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12:1-21) 안식일 논쟁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를 첨예하게 대립시키는 이슈였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세부규정까지 만들었습니다. 원래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기념하고 기억하고 기뻐하는 날이었지만
점차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만 빠져 본래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는 사건과 안식일에 손이 마른 사람을 고친 사건때문에 벌어진 논쟁을 통해 안식일의 참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밝힙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안식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이란 사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 선을 행하는 것은 여전히 옳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12:22-37) 귀신들려 말을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이 고칩니다.
사람들은 놀라지만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비아냥거립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명쾌합니다.
‘같은 편끼리 싸우지 않는다. 이것이 상식이다.’
예수님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령의 역사는 무시하고 전통과 유전 그들만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선한 능력과 역사를 무시했습니다.
이들이 맺는 열매가 선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12:38-45)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 표적을 구합니다. 겉으론 확인하지만 속으론 많은 계산이 깔려있는 그야말로 악하고 음란한 동기에서 나온 요청입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 보일 표적이 없다 대꾸합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예언한 것이면서 동시에 요나시대의 니느웨 사람들은 돌이켰지만 이세대는 그렇지 않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말씀입니다.
(12:46-50) 한편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사람을 가리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말하며 전혀 새로운 가족관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부르실까요?
예수님이 부르는 사람이라고 모두 조건, 배경, 학식, 재능, 권력 등 누가 봐도 수긍할 만한 걸 가진 건 아닙니다.
그것보다 예수님은 겸손하고, 온유하며, 믿고, 따르는 사람을 부릅니다.
우리 모두는 자격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히 예수님만을 따르겠다는 고백을 하면 예수님은 자격 있다 인정해 줍니다.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13장>천국에 관한 비유들
천국은 스스로 지혜 있고 슬기롭다 여기는 사람들, 바리새인 서기관처럼 자기들이 믿는 가치에 묶여 있는 사람들에겐 감춰져 있고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고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겐 드러나 있습니다.
(13:1-23) 예수님은 4가지 땅에 떨어진 씨앗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명쾌하게 알려줍니다.
이 첫 비유는 제자들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인데 예수님은 이사야 6장 말씀을 인용해 굳이 비유로 가르치는 이유를 밝히고 이어 비유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마음의 상태, 곧 말씀이 마음에 닿기도 전에 빼앗기는 길가에 뿌려진 자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넘어지는 돌밭에 뿌려진 자 말씀을 듣지만 세상의 염려와 유혹에 결실을 맺지 못하는 가시떨기에 떨어진 자들은 열매를 맺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좋은 땅은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13:24-50) 좋은 씨가 뿌려진 곳에 가라지가 덧뿌려진 비유는 우리 신앙의 여정이 어때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늘 스스로를 살펴 가라지, 거짓신앙이 자라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쳐줍니다.
또한 가진 모든 걸 다 팔아서라도 반드시 얻어야 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의인과 악인을 구별해 심판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마치 마지막 때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13:53-58) 이런 가르침에도 예수님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도리어 배척당합니다.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능력을 행하지 않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연인으로 보는 한 이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신앙은 믿음으로 시작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며 믿음으로 바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로 시작하는 표현을 사용해 ‘비유적’으로 천국을 가르칩니다. 네 종류의 땅에 떨어진 씨, 좋은 씨와 가라지, 겨자씨, 누룩, 밭에 감춰진 보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 각종 고기를 모으는 그물 비유가 그것입니다.
<14장>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Ⅰ
(14:1-12) 세례요한은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하자 이를 비판했다가 투옥되고 헤로디아의 계략으로 참수됩니다.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역할에 충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이제 구속사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온전히 드러납니다.
(14:13-21) 가르치고 선포하고 치유하는 일에 전념한 예수님 곁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모이는 것까진 좋았지만 그들을 돌보는 일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먹거리 문제입니다.
제자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각자 도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도 안되는 명령입니다. 그들이 가진 거라곤 고작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축사한 후 나눠줍니다.
이렇게 해서 여자와 어린이 외에 5천명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12바구니에 차게 거둡니다. 마태가 기록한 오병이어 기적입니다.
먹거리를 해결하는 것은 이전에 행했던 기적들과 차원이 다른 문제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 아니었던가요?
같은 기적을 기록한 요한은 이후 다른 사건이 있었다는 걸 보도합니다.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먹거리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야말로 통치자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자신들이 고대하던 메시아 왕국을 세워줄 사람이란 생각에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피해 혼자 산으로 갑니다.(14:23) 먹거리를 해결하는 것 이상의 목적 때문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깨우치기 위해서입니다.
(14:22-33)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이적은 계속됩니다. 제자들을 먼저 보낸 후 따로 시간을 보낸 예수님은 깊은 밤에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탄 배로 갑니다.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하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물위를 걷지만 이내 빠지고 맙니다.
베드로는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세상의 염려와 주변의 환경에 시선을 빼앗겨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15장>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Ⅱ
(15:1-20)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문제 삼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정은 장로들이 만든 전통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정결한 삶에 대해 규정했는데 장로들은 손을 씻는 것과 같은 세칙들에 더 무게를 두고서 사람들의 생활전반을 규제했던 것입니다.
율법의 기본의미를 잊은 채 손을 씻는 행위 자체를 더 중요한 것으로 집착하는 말 그대로 악습과 같은 전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부모를 책임지지 않으려고 율법조항을 왜곡 악용하는 문제까지 사례로 들면서 그들의 위선을 파헤칩니다.
그리고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15:21-28) 예수님은 이방인 지역인 두로와 시돈 지방을 방문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들이라고 부르며 모욕하고 무시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에서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외치는 가나안 여인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여느때와 달리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며 이 여인을 외면합니다.
예수님은 사역기간동안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말하는데
(사실 여기에 쓰인 ‘개들’은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들’이란 다소 애정어린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방여인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온마음으로 자기의 믿음을 보였고 딸은 회복됩니다.
마태복음은 일차적으로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였지만,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도 은혜가 부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묵상구절
13:14,15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공생애는 이제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사천명을 먹인 기적(15:32-39) 후 예수님은 소수의 제자들에게 관심을 집중합니다. 자신이 갈 십자가 수난의 길과 제자들이 따라야 할 제자의 길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제자의 길은 한마디로 ‘자기부인’입니다.
마태는 특히 16장에서부터 자기부인의 제자의 길을 강조합니다. 제자의 길을 가기 위해선 먼저 위선적인 가르침을 경계해야하고 예수가 그리스도란 사실을 정확히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신 길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잃을 각오로 따라야 합니다.
실질적, 영적 기득권을 내려놓고 산 아래 사람들에게로 기꺼이 내려 가야하며 겨자씨만한 것이라 해도 진실한 믿음을 가져야 하고 때론 실정법을 준수해야 하는 길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스스로를 낮춰야하고 그 누구든지 실족시키지 않도록 해 잃어버리는 것이 없어야 하며 어떤 것이든 먼저 풀어 용서하고 화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6장>메시야의 자기 공개
(16:1-4)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아직도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변함이 없습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표적이 없다 합니다.
(16:5-12) 시대를 분별하는 눈은 가졌지만 정작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아니 알아보기 싫어하고 자기들의 기득권과 가치에만 몰두하는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날카로운 말씀으로 꾸짖습니다.
제자들에겐 이들의 누룩, 곧 가르침, 위선, 외식을 주의하라고 부탁합니다.
(16:13-20) 13절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으로
옮겨간 후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질문합니다. 이어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묻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고백합니다.
이성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납득할수 없는 고백 하나님이며 동시에 사람이란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이 고백위에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체하는 여호와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합니다.
(16:21-28) 그때 비로소 예수님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에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을 밝힙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목적을 알리 만무한 베드로가 반발하지만 도리어 ‘사탄아 내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꾸중을 듣습니다.
베드로만 그런 생각이었을까요?
나머지 11명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대화 후에 바로 예수님이 ‘제자의 길’을 가르쳤다는 사실이 방증입니다.
제자의 길은 자기부인에서 시작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니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 아등바등 않을 것이고 도리어 자기를 부르신 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7장>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17:1-13)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 베드로를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오릅니다. 예수님은 거기에서 변형되어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집니다.
그 자리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여기 있는 것이 좋으니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합니다. 마침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한 번도 듣거나 보지 못했던 신비한 광경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걸 3명의 제자들에게 각인시킵니다.
-동시에 예수님에겐 공생애 시작 무렵 침례 받을때 들렸던 성부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재확인하며 십자가의 길을 흔들리지 않고 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됩니다.
(17:14-20) 산에서 내려온 후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 달라 찾아온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이미 제자들에게 사정을 다 알리고 아이가 낫기를 바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경위를 파악한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꾸짖으며 아이를 고칩니다.
이유를 묻는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말씀합니다.
(17:24-27) 가버나움에 갔을 때 성전세를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지 않는다고 시비를 겁니다. 성전의 주인인 예수님은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었지만 그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물고기를 낚아 그 속에서 한 세겔을 취해 냅니다.
예수님은 제자의 길을 가르치면서 작은 것 하나까지 세심하게 지키는 본을 보입니다.
<18장>천국 시민의 윤리관
18장은 마태복음의 5개의 말씀모음중 4번째로 천국에서의 관계들에 대한 가르침, 즉 제자 공동체에 대한 설교모음입니다.
(18:1-14)예수님은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어린아이를 내세웁니다.
가장 큰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작고 힘없는 사람도 존중하는 자입니다. 특히 작은 자를 실족시키지 않는 자, 업신여기지 않는 자, 잃지 않는 자입니다.
(18:15-20) 형제가 죄를 지으면 먼저는 당사자에게만 은밀히 권고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만일 듣지 않으면 두세 증인의 입으로 세세히 확증해야 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해야 합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도 됩니다.
개인의 감정과 생각에 치우쳐 잘못된 판정을 내리는 일이 없도록 하란 뜻입니다.
(18:21-35) 종의 비유를 통해 용서에 대해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총 490번, 사실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우린 하나님으로부터 일만 달란트,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6조원을 탕감받은 사람인데
겨우 일백 데나리온 약 1천만 원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비유입니다. 형제는 판단하고 미워하는 대상이 아니라 용서하고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렇게 용서받고 사랑받기 때문입니다.
<19장>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19:1)
도중에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받고 선 ‘결혼과 가정의 참 의미’에 대해
부자 청년의 질문을 받고 서는 ‘영생과 구원’에 대해 가르칩니다.
(19:3-12)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이번에는 이혼문제를 들고 시험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장에 나오는 모세의 이혼법에 근거하여 이혼과 재혼을 쉽게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혼이 아닌 결혼에 집중하며,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처음 알려준 결혼의 원리를 바탕으로 답합니다.
예수님은 우선 가정의 기초인 부부관계의 본질을 놓쳐버린 그들의 완악함을 지적합니다. 이어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디자인이며 창조질서를 이어가는 초석이라 강조합니다.
(19:16-22) 재물이 많은 청년도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종합해 볼 때 재산뿐만 아니라 권력과 지위를 가진 이 엘리트 청년은 영생에 대한 궁금증까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지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 대답합니다.
청년은 아주 자신 있게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사온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되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21절에서 그의 소유를 다 팔 것,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줄 것, 예수님을 따를 것 이렇게 세가지를 제시합니다.
재물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청년은 근심하며 떠납니다. 영생을 원하지만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재물숭배를 중단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19:23-30) 예수님은 재물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세상에서 부자가 구원받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합니다.
다만 26절을 통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 선언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가르칩니다.
<20장> 천국의 實相에 관한 교훈
(20:1-16)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은 포도원에서 일하기 위해 이른 아침(오전 6시)이나 늦은 오후(오후5시)에 온 품꾼들에게 똑같이 하루 삯으로 1데나리온을 주는 비유를 통해 풀어줍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주인은 이른 아침에 품꾼을 얻으러 나갑니다.
당시 토지 소유자들은 자신의 위엄과 체통을 지키기 위해 직접 일꾼들을 뽑거나 상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주인은 직접 동네 장터로 나가서 일거리를 구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제 3시, 제 6시, 제 11시까지 계속 나갑니다. 포도원 주인은 왜 계속 그 장터에 가는 것일까요?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긍휼한 마음 때문입니다.
주인은 그 시간까지 일거리를 찾지 못했음에도 소망을 가지고, 일만 있으면 달려가겠다는 마음으로 ‘서있는 사람들’을 포도원의 일꾼으로 들입니다.
그리고 나중 온 자로부터 먼저 온 자까지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지불합니다. 동일한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먼저 온 자들, 처음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을 받은 자들이 불평하다가 주인으로부터 꾸지람을 듣습니다.
이기심으로 동료 일꾼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 없이 약속된 품삯에만 집착하고 감사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포도원 주인이 하나님을 비유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 아실 것입니다.
à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누구에게든 똑같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20:17-28) 예수님이 세번째로 십자가 수난에 대해 예고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는 야고보와 요한을 위해 좋은 자리를 부탁합니다. 나머지 열명의 제자는 선수를 빼앗겼다는 생각에서인지 분히 여깁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청탁한 것으로 보도합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을 다르게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3년을 동거하며 가르치고 본을 보였는데도 그들의 생각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말씀으로 일축합니다.
☛l묵상구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오늘의 묵상과 기도.
*제자의 길이 자기부인에서 출발한다는 것!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자아가 꿈틀거립니다.
어쩌면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 자체가 자기인정, 자기명예, 자기성공에 있는 것은 아닌 지.. 제자의 길이 아니라 자기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 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막아섰던 순간이 엄청난 신앙고백 직후였다는 것에 놀라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는 길과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을 오해하는 순간 벌어질 수 있는
어쩌면 우리의 죄성이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일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부인’! 예수님을 따르는 길의 유일한 태도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나의 욕심과 죄성에 사로잡혀서 주님의 길을 막아서서 버티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1장>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21:1-13) 예수님은 새끼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갑니다.
형식은 개선장군 같은 모양새지만 모습은 소박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를 통해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합니다. 겸손한 메시아 모습을 통해
앞으로 오게 될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떤 모습일지 알립니다.
이어 성전을 방문해 편의를 위해 제물을 사고팔던 관행을 바로잡으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말씀을 인용합니다.
(21:18-22)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는 저주를 받아 말라버리는데 이는 신앙의 열매없이 잎만 무성한 이스라엘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21:23-27) 예루살렘에 들어온 후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은 계속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여전히 이 점을 못마땅해합니다.
그들은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묻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반문하며 이들의 위선을 두가지 비유를 들어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1st 비유(21:28-32)
큰아들은 말을 듣겠다 하고 듣지 않았지만 작은 아들은 듣지 않겠다 하고 듣습니다. 큰 아들은 지금 예수님과 대립하는 종교지도자들이고 작은 아들은 그들이 혐오하는 죄인들, 세리와 창녀입니다.
예수님의 경고는 엄중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가히 충격적입니다.
2nd 비유(21:33-46)
다음 비유는 더 강력합니다. 포도원을 맡은 농부들이 삯을 받으려고
심부름하는 주인의 종들을 오는 족족 잡아죽이고 심지어는 농부의 아들까지 잡아 죽이는 비유입니다.
주인은 하나님, 농부들은 종교지도자들, 심부름하는 종들은 선지자들,
주인의 아들은 메시아 곧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내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거짓과 탐욕, 위선을 적나라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최종적으로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태복음에 나오는 설교 모음중 5번째는 종말에 관한 설교입니다.
예수님은 이 부분에서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고 재난이 시작되는 징조를 설명한 다음 큰 환난이 있을 것이라 말씀합니다. 이어 인자가 올 때에 깨어 있어야 한다 강조합니다.
<22장>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이 판 함정에 지혜롭게 대처합니다. 그들의 그릇된 신앙관 때문에 생긴 오해는 잘못된 교리를 양산했는데 예수님은 이들과의 논쟁을 통해 진리를 선포하고 그들의 위선을 지적합니다.
세상법을 지킨다면 하나님의 법 역시 따라야 한다는 가르침(22:15-22)
부활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의 논쟁(22:23-33)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에 관한 문답(22:34-40)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과의 관계 규명(22:41-46)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의 위선 지적(23:1-12)
일곱가지 화 선포(23:13-36)가 그것입니다.
22장의 혼인잔치 비유는 21장 마지막 부분과 연결해서 읽어야 합니다.
(22:1-14) 악한 농부로 비유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계속 비유를 들어 그들이 가진 잘못된 종교적 열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죠.
어떤 임금이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초대된 사람들이 저마다 핑계를 대면 참석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심부름하는 종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화가 난 임금은 군대를 보내 그들을 진멸하고 종들을 네거리로 보내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 그가 악한 자든 선한 자든 다 잔치에 초대합니다.
이 초대는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될 것이란 사실을 예견합니다.
하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은 쫓겨납니다.
당시 왕들이 혼인잔치를 열 경우 보통은 초청할 사람들에게 잔치 예복을 제공했다고 합니다. 만일 손님이 제공받은 옷을 입지 않고 왔다면 잔치주인을 심하게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에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단언합니다.
(22:15-22) 세금을 내는 문제는 간단치가 않았습니다.
세금은 이스라엘에서 시한폭탄 같은 쟁점이었습니다.
세금을 내면 로마에 동조할 뿐 아니라 하나님 대신 황제를 인정한다는 종교적 비난을 받게 될 테고 내지 않으면 실정법을 어겨 황제에 반역하는 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걸 잘 알고 있던 돈을 좋아하고(눅16:14) 재리에 밝은 바리새인들이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던 헤롯 당원들까지 끌어들여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려 질문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허를 찌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말은 ‘황제가 만든 건 당연히 황제에게 바쳐야 하고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너희는 당연히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치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포도테는 ‘되돌려 주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한 말씀은 ‘그 동전은 가이사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그에게 되돌려주라. 대신 너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니 너자신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려라’라는 뜻입니다.
<23장>종교 지도자들에 관한 경고
23-25장까지는 마태복음의 5번째 설교묶음으로 심판과 종말을 다룹니다.
23장은 ‘화 있을진저’로 시작되는 일곱가지 화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23:1-12)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자처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정작 자신들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몰랐다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지지 못하는 짐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우면서 겉으로는 온갖 종교적 치장으로 가린 위선적인 모습을 가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높은자리, 문안받는 자리, 랍비라 칭함 받는 것, 지도자라 칭함 받는 걸 좋아했습니다.
(23:13-36)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외식을 지적하며 7가지 경우를 들어 화가 있을 것이다 선포합니다.
(1) 천국 문을 닫고 자신을 비롯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
(2) 가까스로 얻은 교인을 지옥 자식으로 만드는 것
(3) 눈먼 인도자가 되는 것
(4) 십일조 등은 드리지만 율법의 정신은 버린 것
(5) 겉은 깨끗하지만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한 것
(6)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아름다워 보이나 속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 한 것
(7) 과거 선지자들을 죽이는데 앞장섰으면서도 지금은 그렇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는 것 등입니다.
<24장>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24,25장은 예수님이 종말에 관해 가르친 설교입니다.
(24:1-31) 감람산에 앉아서 전했기에 감람산 강화라고 불립니다.
2절의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란 예언은 티투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한 주후 70년에 성취됩니다.
3절에서 제자들은 2가지를 질문합니다.
‘어느때에 이런 일이 있습니까?’,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에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 예언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처럼 이미 성취된 것도 있고 장차 성취될 것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때엔 자칭 그리스도라 이름하는 자들이 나타나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고 난리와 기근, 지진, 핍박이 있을 것이며, 거짓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 불법이 횡행할 것이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징조가 보이거든 하던 일이나 가진 것에 연연하지 말고 속히 산으로 도망하라 합니다.
인자가 오심은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을 것이며 사람들은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묵상구절
23:2,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25장>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25장에는 깨어서 마지막을 준비하는 태도에 대한 세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마지막에 관한 가르침의 핵심은
‘때를 모르니 오늘을 마지막으로 여기고 최선을 다해 살라는 것입니다.’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니 등과 기름을 준비해 깨어 맞이할 준비를 하는것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주어진 달란트대로 열심히 살면서 결산을 준비하는 것
-누가 됐든 그를 예수님 섬기듯 대하는 것
(25:1-13) 혼인을 위해 신부 집에 오는 신랑을 맞이하는 열명의 처녀비유는
예수님이 언제 올지 모르니 등과 불을 준비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걸 교훈합니다.
이 처녀들은 신부의 들러리입니다. 당시 유대의 결혼식에선 신부의 친구들로 이루어진 들러리들이 신부를 준비시키고 함께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슬기로운 5처녀는 등과 기름을 가지고 깨어서 기다려 신랑을 맞이한 반면 미련한 5처녀는 등만 가지고 있는데다 조는 바람에
결국 신랑이 오는 결정적 순간을 맞이하지 못하고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비유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맞을 준비가 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25:14-30) 달란트 비유는 각자 받은 달란트대로 열심히 살면서 언제일지 모르는 주인의 돌아올 때를 대비해 늘 깨어 결산을 준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특히 내 달란트와 남의 그것을 비교하지 말고 각자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지막을 준비하는 태도란 걸 강조합니다.
(25:31-46)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비유는 각자 살아온 평소의 행적이 마지막때에 평가를 받을 것이란 경고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예수님에게 한 것으로 인정돼 오른편 양무리에 속한 자들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반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예수님에게 하지 아니한 것으로 여겨져 왼편 염소무리에 속한 자들은 영벌을 받습니다.
<26장>메시야의 최후 만찬
(26:1-5)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로 향합니다. 마침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흉계를 꾸밉니다.
(26:6-13)한 여인은 비싼 값이 나가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장례를 준비하는 아름다운 헌신을 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엔 이름이 없지만 요한복음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밝힙니다.)
그녀는 자그마치 일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향유를 붓는데 이 행위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죽일 계획에만 몰두한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그것과 비교됩니다.
(26:14-30)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예수님을 넘겨주는 거래를 하지만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최후의 만찬을 준비시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는데 25절에서 유독 유다만 ‘랍비’, 곧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유다의 마음이 어땠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몸이니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복음의 역사에 길이 남는 특별한 유월절 만찬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거룩한 식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것을 기념하며 지금도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성찬을 재현합니다.(고전11:23-26)
이 만찬에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예고하지만 베드로를 포함 모든 제자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 장담합니다.
(26:36-46) 겟세마네에서 이제 예수님은 마지막 갈등앞에 직면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옵소서.’
사람인 예수님이 가진 연약함 때문에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기도는 한 발 더 나아갑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꺾어 얹습니다.
성육신할 때부터의 순종이 여전히 십자가 앞에서의 순종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지치고 피곤한 몸을 이기지 못하고 정작 가장 중요할 때 잠들어 버립니다. 탓할 게 뭐 있겠습니까?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데요. 예수님의 결의는 단호합니다.
‘일어나라 함께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26:57-68) 유다의 배반으로 체포된 예수님은 공회앞에 섭니다.
예수님은 두번 재판을 받았는데 한번은 유대인들에게 다른 한번은 로마인들에게 받았습니다.
본문은 유대인 산헤드린의 재판 장면으로 공회원들은 증인들을 동원해 예수님을 심문하지만 예수님은 침묵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마침내 원하는 대답을 들은 공회원들은 옷을 찢으며 신성모독죄를 씌워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합니다.
구원자가 그들 앞에 있는데, 창조주가 스스로를 밝히 드러내는데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전통, 가치관에 매여 하나님을 죽이는 초유의 결정을 내리고 만 것입니다.
(26:69-75) 멀찍이 이 광경을 지켜보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예고한 대로 닭이 울기 전에 세번이나 부인합니다.
큰 소리치며 장담하던 모습은 어디가고 이렇게 초라한 패배자가 돼 버린 것일까요? 예수님의 예언이 생각난 그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합니다.
<27장>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자신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예수님을 보고 화가 난 군중 종교권력과 기득권에 위협이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종교지도자들 3년을 같이 지냈지만 여전히 예수님에 대해 잘못 이해했던 제자들 예수님이 지는 십자가는 이들 모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는 모습으로 일관하며 구원을 위한 길을 걸어갑니다.
(27: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깁니다.
사형집행권을 박탈당한 그들은 사형언도만 할 뿐 집행권한이 빌라도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27:3-10)유다는 자기가 넘긴 스승이 사형언도 받는 것을 보고 뉘우치지만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27:11-26) 예수님에게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찾지 못한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려 했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군중의 거센 요구때문에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님에 대한 사형집행을 명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빌라도는 유약한 동시에 잔인한 자로 많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을 학살했다고 합니다.)
빌라도는 결국 자신의 정치적 권력과 안정을 위해 사형을 결정하고 손을 씻는 행동을 보이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27:27-44) 군병들은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희롱한 다음 십자가에 달기 위해 골고다로 끌고 가서 못 박습니다.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형벌로 알려진 십자가 처형은 천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천한 사람을 처형하는 방법이었고 반역이나 민란 등 중죄를 저지를 자들에게 사용하던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머리위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가 붙습니다.
유대인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왕이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외치던 예수님은
로마제국에 대항해 반란을 꾀한 정치범이란 타이틀로 십자가형을 받은 것입니다. 나란히 못박힌 두강도도, 지나가는 사람들도, 제사장들도, 서기관들도, 장로들도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조롱하고 비웃습니다.
(27:45-56) 어두운 죄악을 상징하듯 제 육시(정오)부터 온 땅이 깜깜해지더니 제구시(오후3시)까지 지속되고 예수님은 ‘엘리엘리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칩니다.
성경전체에서 가장 신비로운 말씀 중에 하나로 꼽히는 이 구절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며 영원전부터 이어지던 성부의 사랑과 교제에서 끊어져야 했기에 부르짖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예수님이 시22:1을 인용하면서 아마도 승리로 바뀌는 시의 나머지 내용을 알고 외쳤을 것이라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후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둘이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잠자는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납니다.
모든 광경을 지켜본 이방인 백부장과 예수님을 지키던 자들은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읊조립니다. 아이러니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있다 자처하는 사람들은 정작 메시아를 거부하고, 전혀 상관없이 살던 사람들은 잠깐 그것도 최후의 순간에 가장 무기력해 보이는 상황을 보고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연수나 경험보다 순수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실히 드러내는 대비입니다.
(27:57-61) 생명의 위협때문에 모두가 숨죽이고 있을 때 뜻밖의 사람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 나타납니다.
마태는 그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히고 마가와 누가는 그가 산헤드린 공회원이라 전합니다. 그는 날이 저물 때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 요구한 후 자기의 무덤에 안치합니다.
(27:62-66) 한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혹시 벌어질지 모르는 일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친 후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때문에 경비병들을 세워 무덤을 지키게 합니다.
<28장>부활하신 예수
죽음이 예수님을 가둬놓을 수 없었습니다.
죽음이 생명을 가둘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은 약속대로 삼일만에 부활했고 제자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을 것을 당부합니다
(28:1-10) 생명이 죽음을 이깁니다. 죽음이 생명을 가둬놓을 수 없습니다. 생명인 예수님이 부활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안식후 첫날 새벽에 여인들(막달라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들은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마지막까지 자신들이 따랐던 분에 대한 예를 다할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빈무덤’, ‘빈무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기에 비어있는 무덤 생명은 죽음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이 상징인 빈 무덤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평안 하냐’인사하며 이 여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고 갈릴리에서 만날 것이라 말합니다.
(28:11-20) 한편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경비병들을 비롯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적잖게 당황하는데 부활을 감추기 위해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해 갔다고 거짓소문을 퍼뜨립니다.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난 예수님은 지상명령 대위임명령이라 불리는 말씀을 선포합니다. ‘이방을 향한 복음 선포’ 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삶에서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까?
신앙인이 전할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모든 인간을 구원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이 소식을 들었기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4-15)
이제 우리는 우리가 듣고 겪은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야 합니다.
같이 누려야 합니다.
주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묵상구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26:42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묵상과 기도.
* 내 뜻을 내려놓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신앙은 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내 뜻과 내 계획, 내 욕심대로 하고픈 열망과의 투쟁입니다.
예수님조차 자신의 의지와 마지막까지 내적투쟁을 했다면 우리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도, 결국 자기생각, 자만, 종교적 신념을 내려놓지 못해서 아닐까요?
내려놓느냐 마느냐 갈등을 최소화 할 수 있는 건 아니 갈등 자체를 겪지 않는 것 우리 주님처럼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고백을 드릴때입니다.
내 뜻, 내 계획, 내 욕심을 내려놓는 훈련을 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의 삶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